
섬광 In the Flicker
빛은 어떤 장면이 우리 눈에 닿기 전에 먼저 도달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보았다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사실 그 형상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낸 빛이다.그러나 그 빛은 한결같지 않다. 섬광과 어두움이 빠르게 교차하는 점멸 속에서 우리는 자주 속는다. 하나를 둘로 보고, 분명히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지나치며,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한다. 무엇이 진짜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흐려진다. 섬광은 모든 형태를 잠시 드러내고는 곧 거두어 가지만, 바로 그 점멸의 틈에서 방향을 잃은 시대의 감각과, 끝내 붙잡히지 않은 채 흩어지는 장면들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다.
구두 Dress Shoes
구두는 몸을 지면과 단단히 연결시키는 장치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몸이 표현하려는 박자를 거꾸로 일러주고, 그것을 신고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다음 발을 내디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그러므로 구두가 끝내 알리는 것은, 우리의 움직임이 정처 없는 보행이 아니라 어떤 리듬을 향한 몸짓이라는 사실이다. 한 박자가 어긋나도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바닥과의 마찰을 견디며 다음 걸음을 디딜 수 있게 하는 가장 낮고도 단단한 받침. 구두는 그렇게, 흔들리는 삶 위에서도 끝내 다음 발을 내딛게 하는 몸의 리듬과 멈추지 않으려는 지속의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
칵테일 Cocktail
칵테일은 하나의 맛으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단맛과 쓴맛, 향과 알코올, 얼음이 녹으며 흐려지는 농도가 한 잔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동시에 붙잡는다. 달콤하지만 조금은 씁쓸하고, 즐거웠지만 어쩐지 피로한 감각. 그것은 뒤섞임 자체가 하나의 형식이 된 음료다.우리의 공존 또한 그러하다. 각자의 고독과 사정을 지닌 채 같은 공기와 리듬을 나누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곁을 지나고 부딪히고 때로는 함께 흔들린다. 그러므로 공존은 완전한 합일이라기보다 불완전한 혼합에 가깝다. 칵테일은 그렇게, 각기 다른 개별자들이 잠시 같은 장면을 만드는, 불완전하지만 선명한 공존의 순간을 한 잔 안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전시 서문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처음 마주한 것은 비릿한 땀 냄새와 눅눅한 열기였다. 발 아래 닿는 무대는 미끄러웠고, 나는 그 위로 빨려 들어갔다. 바깥의 시간은 무심할 만큼 곧게 흘렀고, 이 안에서의 시간은 더 이상 하나의 방향을 갖지 않았다. 흩어지고, 끊어졌다가 연결되며, 다르게 작동하고 있었다.머리 위로 조명이 날뛸 때 세상은 잠깐씩 형태를 잃었다. 그 짧은 순간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틀비틀 흔들렸다. 그것이 몸부림인지, 모든 긴장을 놓아버린 황홀의 춤인지 쉬이 분간할 수 없었다. 도취가 한데 뒤섞여 부유하는 동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조명과 음악이 꺼지지 않는 한 누구도 그 장면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시야가 흐려질 때, 본능처럼 허공을 더듬었고, 어둠 속에서 어떤 이의 어깨와 팔이 부딪혔다. 이 만남은 서로의 궤적 안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부딪히고 빗나가기를 반복하며 우리의 몸은 필연적으로 얽혀들었다.갈증이 차올랐고, 입에는 단맛과 쓴맛이 함께 맴돌았다. 아름답다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하고, 절망이라기엔 너무 깊게 밴 움직임에 우리는 끝내 몸을 멈추지 않았다. 미래가 약속되지 않는 무대 위에서도, 이 모든 것이 무의미에 가까워진다 해도, 계속해서 움직였다. 우리는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The moment I opened the door. The first thing that met me was the raw, salty smell of sweat and the damp heat. The stage beneath my feet was slippery, and I was drawn into it. Outside, time moved forward with almost indifferent straightness, but inside, time no longer had a single direction. It scattered, broke apart, reconnected, and began to operate otherwise.When the lights flickered overhead, the world briefly lost its shape. In those fleeting moments, the figures of people appeared unsteady, staggering and swaying. It was difficult to tell whether this was the body writhing or a dance of ecstasy in which every tension had been released. As intoxication drifted through the air in a single, tangled mass, I could no longer tell where I was going or what kind of expression I was wearing.As long as the lights and music did not stop, no one seemed willing to stand still. When my vision blurred, I reached into the air as if by instinct. In the darkness, someone’s shoulder and arm brushed against mine. It felt like a way of confirming that we were still alive inside each other’s paths. As we collided, slipped past one another, and crossed again, our bodies inevitably wove themselves loosely together.Thirst rose in me, and a sweetness and bitterness lingered together in my mouth. Too harsh to be called beautiful, yet too deeply steeped in movement to be named despair, we did not stop our bodies in the end. Even on a stage where the future was not promised, even if all of this came close to meaninglessness, we continued to move. After all, we were those who could not help but dance.
전시 정보
포스터 디자인 진서영, 김은아, 신서영, 이경민
〈 전시 공간 〉
Main Exhibition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1관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 94
홍익대학교 문헌관 4층2026.6.15. Mon – 2026.6.20. Sat
Mon - Fri. 11:00 - 19:00
Sat. 11:00 - 17:00
Performance Hall
한국문화예술센터 홍익대센터
아트앤디자인밸리 B201-2퍼포먼스 1회차
2026.6.19. Fri 18:00
퍼포먼스 2회차
2026.6.20. Sat 13:00
〈 행사 〉
오프닝 리셉션 & 라이브 디제잉
DJ 유노송
2026.6.15. Mon 17:00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1관 (문헌관 4층)
〈 기획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전시기획팀 FLUX 614
배민성 이혜린 강민 김신 김유진 김은아 박서윤 신서영 안준태 양정원 오연서 이경민 이상익 이하나 정세빈 조은영 진서영
최민서 한수빈 한효진
프로그램
1. 기획자 도슨트 프로그램

큐레이터들이 담당 작가의 작품 앞에서
전시를 기획하며 발견한 시선과 작업의 맥락을
직접 소개하는 도슨트 프로그램
일시
2026.6.17. Wed 17:00장소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1관소요 시간
약 50분참여 방법
현장 참여 / 무료
2. 관객 참여 프로그램 ‘몸짓 걸기’

일상의 몸짓을 골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 담긴 개인적 기억을 되살리는
관객 참여 프로그램
일시
2026.6.19. Fri 18:30
2026.6.20. Sat 13:30
*본 프로그램은 퍼포먼스가 끝난 후 진행됩니다.장소
홍익대학교 아트앤디자인밸리 B201-2호소요 시간
약 30분참여 방법
현장 참여 / 무료
3. 관객 참여 프로그램 ‘Everything Dance Cam’

관람객이 카메라 앞에서 원하는 포즈를 취하면
원형 파티클 실루엣 이미지로 변환되어
저장할 수 있는 참여형 포토 프로그램
일시
2026.6.15. ~ 2026.6.20. 전시기간 내내장소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1관소요 시간
약 1분참여 방법
현장 참여 / 무료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5초간 유지하면,
원형 파티클 실루엣 이미지로 변환되어 저장할 수 있다.
후원 및 협찬

박서보장학재단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2022년 설립한 장학재단이다. 모마 뮤지엄, 구겐하임, 퐁피두센터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박서보 화백은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들이 경제적 이유로 꿈을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본 재단을 설립하였다. 현재까지 홍익대학교 순수미술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 학기 장학생을 선발하여 지원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박서보 화백이 생전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예술학과의 전시를 처음으로 후원하며 그 뜻을 함께한다.

한국문화예술센터는 예술이 특별한 공간에만 머무르지 않고 누구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운영되는 문화예술센터다. 국내 다양한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응원하며, 작가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소개하고 예술과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트인디자인밸리 B201-2호에 위치한 공간을 제공하며 《Everything Dance Hall》과 함께한다.

테라톤은 2001년 설립되어 스피커, 헤드폰 등 다양한 음향기기를 판매해온 전문 업체이다. 오랜 업력을 바탕으로 축적된 음향 기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성을 갖추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 음향 장비 협찬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보다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본 전시에서는 테라톤이 협찬하는 스피커와 헤드폰을 통해 소리를 매개로 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섬광 섹션의 최지우 〈탑 탈출기〉와 칵테일 섹션의 윤대원 〈빙글-뱅굴 시리즈〉에는 테라톤이 협찬하는 스피커가 제공되며, 구두 섹션의 서혜림 〈영원했으면 하는 건 무엇인가요?〉에는 테라톤이 협찬하는 헤드폰이 제공된다. 소리가 작품의 핵심 언어로 기능하는 각 작품에서, 테라톤의 음향 장비는 관람객이 작가의 의도에 한층 깊이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파워비뇨의학과의원은 분당 정자동에 위치한 암검진, 리줌 전문 비뇨의학과로, 대학병원 과장 교수 경력의 한준현 원장이 이끌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 따뜻한 마음으로 후원에 함께 해 주었다.

(주)썬텍은 전국의 협력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태양광 발전소의 유지보수와 안전관리를 지원하는 전문 기업이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환경과 안전한 현장 운영을 위해 노력하며 친환경 에너지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 따뜻한 마음으로 후원에 함께해 주었다.

이은혜는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동문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기획자와의 인연으로 《Everything Dance Hall》에 함께하게 되었으며, 뜻깊은 자리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어 기쁘다는 말을 전해왔다. 선배 예술가로서 건네는 그 따뜻한 마음이 전시의 든든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FLUX 614
FLUX 614는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4학년 교과목 <전시기획 및 실습>을 기반으로 결성된 신진 기획자 콜렉티브입니다.
해당 교과목은 정연심 교수님의 지도 아래 매년 기획전을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그룹명 ‘FLUX 614’는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흐름을 뜻하는 ‘flux’와, 기획의 출발점이 된 홍익대학교 강의실 R614호를 결합한 이름입니다.해당 교과목은 매년 정연심 교수님의 지도 하에 미술적 담론에 대한 기획전을 개최해오고 있습니다.INSTA @practiceof.curating
EMAIL [email protected]
ARCHIVE https://practiceofcurating.carrd.co총괄 배민성 이혜린
기획 배민성(팀장), 이혜린(부팀장), 박서윤, 이상익, 최민서, 한수빈
디자인 진서영(팀장), 김은아, 신서영, 이경민
홍보 강민(팀장), 김유진, 양정원, 한효진
장비・공간 김신, 안준태, 오연서, 이하나, 정세빈, 조은영지도교수 정연심
전시 자문 정연심, 김효진

Copyright © 2026 FLUX 614
웹사이트 제작 김유진
김가진 Kajin Kim
김가진(b.1993)은 미디어에 의해 파편화된 현대인의 존재 방식과 관계의 감각을 투명한 물질과 빛을 통해 탐구한다. 그의 작업에서 빛은 형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전원이 꺼지는 순간 사라지는 덧없는 매개로, 존재를 결코 고정하지 않는다.주요 연작 〈Habitable Dialogue〉(2022–2026)에서 레진은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이자 접촉을 허용하는 통로로 작동하고,〈Embedded Embrace〉(2023–2026)의 반투명한 실리콘과 라이트박스는 연결이 가능하면서도 차단된 관계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작업 속 존재들은 중첩되거나 희미한 잔영으로 남으며, 관계가 불안정한 접촉 속에서 형성됨을 보여준다. 최근 작업인 〈Placeholder〉(2026)에서는 이러한 불안정성을 결핍이 아닌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신체의 경계는 더욱 흐릿해지고, 빛을 통과한 신체 이미지는 떠오르며 부재와 현존이 동시에 감각된다. 그 안에서도 서로를 감싸 안는 몸짓은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도 서로에게 가닿고자 하는 움직임을 드러낸다.
불안정함까지 인정하는 삶을 향하여
글 한수빈
김가진(b.1993)의 인물은 하나의 형체로 고정되지 않고 흔들린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작가는 투명한 에폭시 레진과 빛을 사용해 서로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물의 고요한 몸부림을 만들어낸다. 그의 작업 속 인물들은 때로는 무너지고, 때로는 간신히 연결되며, 서로의 신체와 경계를 흐릿하게 포개어낸다. 보는 이는 그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 다시 말해 에로스적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출품작〈Habitable Dialogue XVII〉(2026)와〈Habitable Dialogue XVI〉(2026)는 레진 위에 전사된 두 인물의 이미지를 빛과 함께 보여준다.〈Habitable Dialogue XVII〉에서 보라색 인물은 상대적으로 견고해 보이는 노란 인물에게 기대어 흘러내리는 듯하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탱하는 힘을 드러낸다. 한편 〈Habitable Dialogue XVI〉에서는 노란 인물과 분홍빛 인물이 서로를 붙들고 하나가 되려는 것처럼 보인다. 두 인물 사이의 경계는 겹쳐지고 흐려지며, 각자의 색은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든다.〈Embedded Embrace V〉(2026)에서는 경계의 흐려짐이 더 직접적인 에로스적 사랑으로 드러난다. 두 인물의 토르소는 서로 겹쳐지고, 가닿은 손길 역시 보다 선명하게 그려진다. 희미하게나마 얼굴의 형체가 읽히는 이 작품은 이들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이고 내밀한 차원에서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서로의 피부가 맞닿은 상태에서 타인의 살아 있음을 감각하는 개인적인 체험을 보는 이에게도 전달한다.그럼에도 김가진의 작업에서 관계는 결코 안정적이거나 완벽하게 조율된 상태로만 제시되지 않는다. 작가가 사용하는 빛은 가변적이며, 언제든 꺼질 수 있는 불안정한 조건 위에 놓여 있다. 레진의 표면 역시 단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 맺힌 인물들은 흐릿하게 번지고 흔들린다. 이처럼 빛과 레진의 물성은 관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취약함까지 함께 드러낸다. 최근 신작 〈Placeholder〉(2026)에서는 이러한 취약함이 단순한 결핍으로 남지 않고, 불완전한 상태를 감내하면서도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손길을 드러낸다.김가진의 작업은 결국 불안정한 존재들이 어떻게 함께 머물 수 있는지를 묻는다. 방향성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 시대에, 흔들리는 채로 함께 공존하고, 서로를 지탱하며, 다시 맞닿고자 하는 욕망은 더욱 중요해 보인다. 김가진의 인물들은 바로 그 불완전한 접촉의 순간 속에서, 불안정함까지 인정하는 삶의 가능성을 조용히 비춘다.

김가진, 〈Habitable Dialogue XVII〉, 2026, 에폭시 레진에 이미지 전사, 조명, 88 × 100 × 0.3 cm

김가진, 〈Embedded Embrace V〉, 2026, 실리콘, 열성형 아크릴, LED 조명, 39 × 45 × 15 cm

김가진, 〈Placeholder I〉, 2026, 투명 필름에 인쇄, 열성형 아크릴, 조명, 29 × 19 × 8 cm
김다솔 Kim Dasol
김다솔(b.1995)은 일상의 몸짓을 여러 기록 방식으로 수집하고, 이를 다양한 매체로 번안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가는 몸짓을 삶의 습관이 배어 있는 신체의 흔적으로 이해하는 한편, 이를 고유의 조형 언어로 독해한다. 그의 작업은 타인의 몸짓을 스캐닝과 프로파일링 등의 방식으로 ‘기록’ 하고, 이를 회화, 도자, 소프트 조각 등의 매체로 ‘번안’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본 전시에서 선보이는 〈Painting Choreography〉(2025)는 타인의 몸짓을 안무 기보법의 체계를 참조한 회화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그리고 〈무성생식〉 시리즈(2023)는 몸짓을 스캐너를 통해 채집한 뒤, 뒤집힌 도자와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체적 형상으로 출현시킨 작업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차와 어긋남은 타인에게 가닿으려는 불완전한 시도의 흔적으로 남는다. 한편 〈Sewing service〉시리즈(2026)에서는 삶과 노동의 몸짓을 보조하는 ‘조형적 생존 도구’를 통해, 창작과 삶의 수평적 관계를 탐색한다.
번안된 몸짓, 삶을 깁는 보철
글 신서영
말하기의 몸짓, 만들기의 몸짓, 사랑하기의 몸짓. 우리의 삶은 무수한 몸짓의 연속이자, 이를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이때 몸짓은 단순한 물리적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생각과 감정이 정동으로 표출되는 현상¹이자, 개인의 내밀한 습관과 자율의 흔적이다. 김다솔은 이러한 몸짓을 삶의 습관이 배어 있는 암호이자, 읽어내야 할 언어로 바라본다.그의 작업은 일상에서 포착한 타인의 몸짓을 드로잉이나 프로파일링으로 ‘기록’하고, 이를 회화, 도자, 소프트 조각 등의 매체로 ‘번안’하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스캐너로 채집된 몸짓은 뒤집힌 도자와 결합하여 〈무성생식〉시리즈 (2023)에서 생명체적 형상으로 나타난다. 매체를 경유하며 발생하는 필연적 오차와 불완전성은, 가마의 흐릿한 열기를 거쳐 나올 때까지 예측 불가능하게 변모하는 도자의 우연적 속성과 맞닿는다. 몸짓을 번안하는 행위는 회화의 영역으로도 확장된다. 〈Painting Choreography〉 (2025)는 안무기보법의 체계를 빌려 몸짓을 이미지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화면은 선택된 기보 원칙에 따라 타인의 무의식적인 리듬을 드러내며, 수신 과정에서 발생하는 타인의 신체적 흔적이 더해진다. 이러한 ‘따라하기’의 과정들은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가닿으려는 시도의 흔적이다.몸짓을 추적해온 작업은 창작과 생업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효율성과 정확성을 요구하는 서비스직에 오랜 시간 종사하며 생긴 ‘잘 움직이는 신체’에 대한 관심은, 숙련된 달인들의 몸짓으로 확장된다. 〈Sewing Service〉 (2026)는 생업에서 마주한 달인들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이다. 펠트와 레이스 천을 기워 만든 형태는 무거운 것을 거뜬히 들거나, 강하게 집고 섬세하게 내려놓는 노동의 몸짓을 보조하는 ‘조형적 생존 도구’로 작동한다. 유연하고 경이로운 움직임을 향한 염원으로 만들어진 이 보철은 실제 신체에 달리는 순간 비기능적인 오브제로 전환되지만, 역설적으로 삶과 창작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공존의 도구로 남는다.김다솔에게 몸짓은 분명한 의미를 지닌 행위이며, 삶을 이루는 능동적인 현상이다. 타인의 세계에 다가가는 방향은 때로 뒤틀리고, 살아가는 움직임은 휘청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흔들림과 빗나감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지속되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고유한 박자가 되어, 삶이라는 무대를 완성하는 춤이 된다.
¹ 빌렘 플루서, 《몸짓들》, 안규철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18, p.15

김다솔, 〈Cadence(Statically)〉,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 × 130.3 cm
김다솔, 〈Cadence(Actively)〉,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 × 130.3 cm
김다솔, 〈Cadence(Upside Down)〉,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 × 130.3 cm

김다솔, 〈주마간산〉, 2023, 펄프지에 레이저 프린트, 도자에 유약, 38 x 35 x 31 cm

김다솔, 〈멀리 있는 손님에게 다가서는 방법〉, 2026, 펠트, 퀼팅 실, 지지미 천, 백자토, 유성펜, 가변설치

김다솔, 〈하나를 완벽하게 건네는 방법〉, 2026, 펠트, 퀼팅 실, 지지미 천, 92.5 × 47 × 17 cm
신상준 Shin Sangjun
신상준(b.1999)은 아크릴과 수채로 그린 이미지 위에 한지를 배접하며 층을 쌓는다. 게임 속 풍경과 고향의 잔상은 겹겹이 쌓인 막 뒤로 가려져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불투명한 화면을 통하여 도달점을 잃고 흔적을 좇아 배회하는 화면을 구성한다.〈오르막-광장〉, 〈언덕-성루〉, 〈옥상-성루〉(2026)에서 인물과 구도는 어디론가 향하는 듯 보이지만, 화면은 끝내 목적지를 가리키지않는다. 신작 〈방파〉(2026)는 ‘방파제’에서 둑을 의미하는 ’제(堤)’를 떼어낸 말이다.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히고 너머로 넘어가듯,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구도는 남아 풍경을 온전히 드러내는 대신 그것이 있었을 흔적으로 머문다.그는 대상을 확인하려 할수록 그것과 멀어진다는 것을 마주하며, 신작에서 도상들이 가리키는 듯했던 도달점을 지워냈다. 그러나 사라진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붓질 너머에 있었다고도 없었다고도 단정 지을 수 없는 것들이 화면에 머문다. 안착하지 못한 채로도 세계를 감각하며 헤매는 움직임 자체가 그의 회화를 이룬다.
주어가 소거된 자리
글 배민성
대상이 소거된 화면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부재를 감각하는가. 존재의 부재를 인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 대상을 둘러싼 구도와, 그것이 놓여 있던 주변의 움직임이다. 감각은 대상의 위치에 막히고 굴절되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대상이 그곳에 있었음을 감각할 수 있다. 신작 〈방파〉(2026)¹ 이전의 작업에서 화면은 그가 겪어온 환경의 변화, 그에 비롯되는 기억과 경험의 간극이 투사된 자리였다. 그는 가장 가깝게 떠올린 게임 이미지나 고향의 풍경을 화면에 담고자 했을 때, 경험한 것과 이미지로 남은 것, 그리고 다시 떠올린 기억과 실제로 되짚어간 자리 사이에는 낙차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 낙차 속에서 대상은 낯설게 되돌아왔고, 경험의 주체는 화면 속에서 지워진 채 새롭게 포착된 대상들만이 남았다.작품 속 드러난 인물의 뒷모습과 장소의 변주는 어딘가로 이동하는 서사를 만들어내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서사는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인물과 풍경은 계속해서 나타나지만 정작 그것이 향하는 곳은 끝내 드러나지 않은 채, 관람자는 그 사이를 헤매게 된다. 이입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기에 비로소 작동할 수 있었던 서사이자, 동시에 그 서사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기에 방랑이 되어버리는 구조, 이 이중의 맞물림으로 움직인다.〈방파〉(2026)의 화면은 이입의 대상들을 넘어서 그 다음의 장면을 펼쳐낸다. 그의 개인적 태도가 투사된 화면을 넘어서, 대상의 움직임이 남긴 궤적을 풀어낸다. 이번 신작에서는 대상이 사라진 형태로 구성된다. 파도가 향하던 대상의 위치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의 잔상만이 남아있다.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히면서도 결국 그 너머로 넘어가듯, 이 막힘은 완전한 차단으로 끝나지 않는다. 도달과 동시에 후퇴가 이뤄지는 파도의 운동은, 실재로 향했지만 다시 또 멀어지는 감각. 어딘가를 돌아다녔음에도 무언가라 할 만한 것을 마주하지 않는, 그러나 꼭 그랬다고 할 수만도 없는 것. 신상준이 그려온 방랑은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형태였는지도 모른다.대상을 가로지르던 동사적 움직임만을 남겨둔 형식은 대상이 사라진 뒤 비로소 나타나는 존재의 공백을 가시화하는 일이다. 결국 그가 구축한 주어 없는 구도는 관람자와의 접점 속에서 비로소 작품에 담고자 한 서사성을 획득하게 된다. 지우고 흐리는 행위는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불안정한 감각과 깊이 맞닿아 있다. 막힌 자리에서 형태를 남겨두는 그의 회화적 방법론은 목적지 없이도 발생하는 이미지의 가능성과 정착하지 못한 채 지속되는 방랑의 감각을 추적한다.
¹ 〈방파〉는 방파제에서 둑을 의미하는 ’제(堤)’를 떼어낸 말로서 막고 부수고 비껴내는 동작만을 남긴 것을 의미하는 제목이다.
부딪히고 흩어지는 자리에서
글 조은영
신상준의 작업을 '확정의 유보'라는 관점에서 읽는다면, 이는 확인을 가능하게 하는 기준 자체를 스스로 유예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는 의미가 계속 생성될 수 있는 화면을 구축한다. 끝내 확정되지 않는 상태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상상의 가능성이 발생하도록 화면을 열어두는 것이다.그에게 배접은 화면을 흐릿하게 만드는 기법인 동시에 이미지를 하나의 의미로 고정하려는 시도를 늦추는 장치로 작동한다. 배접은 본래 동아시아 전통 회화에서 종이의 보존과 보강을 위해 사용되어 온 기법으로, 작품의 뒷면에 닥지나 선지를 덧대어 지지체를 보강하고 그림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화면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역배접은 이 방향을 뒤집는다. 종이를 뒷면이 아니라 앞면에 올려 그림을 덮고, 그 위에 수채물감을 다시 얹어 형상의 윤곽을 번지게 한다. 아크릴릭 바인더로 종이를 접착하는 과정에서 수채물감은 층과 층 사이로 스며들며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번지고, 이렇게 포개진 얇은 종이층은 형상의 경계를 흐리며 이미지를 단번에 읽히지 않게 한다. 시선은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못하고 화면을 반복해서 오가며, 이때 흐릿함은 판단의 유보 자체를 화면 위에 지속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이러한 조형적 태도는 〈언덕-성루〉, 〈옥상-성루〉, 〈오르막-광장〉(2026)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게임 이미지와 고향의 풍경을 중첩시키며 실제와 가상이 교차하는 장면을 구성해 왔다. 화면에는 인물과 풍경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등장한다. 관객은 화면 속 단서들을 연결하며 장면을 구성하려 하지만, 그 관계는 하나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계속 열어 둔다.신작 〈방파〉에서는 이러한 관심이 '방랑'이라는 개념과 맞물리며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파도는 잠시 드러났다가 다시 흐려지고, 전경과 후경은 하나로 겹쳐지지 않는다. 그의 표현처럼 '방파제'에서 '제(堤)'를 덜어낸 〈방파〉는 막아서던 둑의 형상을 지우고, 부딪히고 흘러가는 움직임만을 화면에 남긴다. 작가가 말하는 '방랑' 역시 목적지 없는 이동 자체를 긍정하는 감각에 가깝다. 이는 화면 속에서 시선이 계속 움직이는 지각의 방식으로 구현된다.결국 신상준의 작업이 〈방파〉에 이르기까지 밀고 나간 것은, 형상이 흔들리는 상태를 지속시키며 시선이 화면 위에서 유랑하도록 조직하는 일이었다. 대상이 사라지고 장소가 흐려질수록 화면은 오히려 더 많은 관계의 가능성을 향해 열린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확정의 유보는 끝내 하나의 의미로 닫히지 않는 화면을 구축하는 조형적 원리로 기능한다.

신상준, 〈옥상-성루〉, 2026, 캔버스에 종이, 수채물감, 아크릴릭, 90.9 × 72.5 cm

신상준, 〈오르막-광장〉, 2026, 캔버스에 종이, 수채물감, 아크릴릭, 90.9 × 72.5 cm
정들돌 Duldol Jeong
정들돌(b.2001)은 대상을 다각도에서 바라보며, 서로 어긋나는 감각의 관계에 대해 탐구한다. 종이, 석고, 마스킹 테이프 등 다양한 물성을 활용해 작가만의 회백색 언어로 풀어내고,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질감의 층위가 축적된 종이벽을 세운다. 그는 검은색과 흰색(검정과 하양)의 이분법이 아닌 그 사이에 놓인 회색 스펙트럼에 주목하며, 이를 하나의 태도로 삼아 규정 이전의 감각을 머무르게 한다.〈Hallo שלום مرحبا〉는 (2024-2025)는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시와 외국어 등을 겹쳐 얹은 종이벽으로, 흐릿한 표면 사이로 의미가 흩어지는 풍경(화면)을 제시한다. 그는 파편화된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어긋난 상태를 작업의 구조로 유지한다. 이러한 구조는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며 다양한 감각이 공존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제도적 해석의 틀과 지속적인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흐릿한 답안, 미약한 존재의 대응방식
글 김은아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그 사이의 회색. 우리는 이를 종종 애매하고 모호한 상태로 여긴다. 그러나 정들돌에게 회색은 경계를 흐리고, 서로 다른 감각과 의미가 머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그는 종이, 석고, 마스킹 테이프 등 다양한 물성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회백색의 표면을 구축한다. 그렇게 형성된 표면은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서로 다른 감각과 의미가 잠시 머무는 장이 된다.〈its me. i am error mirror저예요. 제가 범인이에요. 제가 이 굴절을 만들어냈어요. 저는 에러 미러예요. 더러운 유리창이에요. 당신도 다르지 않아요.〉(2025)은 거울 위에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는 작업이다. 거울이 보여주는 탁한 화면은 세계를 곧바로 규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금은 어긋난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감각하게 한다. 이러한 시선은 종이벽 작업의 표면에서도 드러난다. 해석하기 어려운 외국어와 시구 등이 얼기설기 겹쳐 있는 회색조의 표면은, 무언가를 담아내면서도 끝내 선명하게 나타내지 않는다.서로 엇갈리는 감각과 해석이 스치는 회색의 표면으로부터 정들돌이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을 읽어 보자. 〈찌루는 쇠 굽능 쇠 / 내가 든 빛나는 은색의 쇠는 칼인가 나는 너를 칼로 찌르지 않고 / 얇은 철사로 / 너의 흐름을 느끼고 / 그에 따라 구부리며 모양을 느끼고 싶다〉(2025) 작품 제목에서 말하는, 칼을 칼로 받아치는 대신 얇은 철사로 그 움직임을 느끼고 구부러지며 형상을 감지하는 일.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어느 미약한 존재가 자신의 감각을 잃지 않은 채 세계와 공존하기 위해 선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 이처럼 그는 완고한 구조를 정면으로 돌파하거나 그것을 또 다른 힘으로 제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는 쉽게 바꿀 수 없는 세계 앞에서, 오히려 아주 조금 비껴선 자리에서 그 흐름을 감각하고, 굴절시키고, 다른 방향으로 번역한다.그의 작업은 선명한 정답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어긋남과 틈, 번역되지 않는 상태를 오래 붙든다. 서로 다른 의미들이 완전히 합쳐지지도,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은 채 공존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정들돌은 실패가 아닌 가능성으로 바라본다. 그의 작업에서 흐릿함은 하나의 답안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명확한 결론 대신 불분명함 속에 머무르며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미약한 존재가 세계와 맞서는 대신 세계와 공존하기 위해 선택한 대응 방식이다.
섬광과 춤 사이
글 진서영
《Everything Dancehall》은 삶을 하나의 댄스홀로 바라보며, 흔들림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움직임을 춤이라는 은유를 통해 사유한다. 댄스홀 안에서 섬광은 점멸한다—춤추는 몸들을 잠깐 드러냈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거두어 간다. 그 빛 아래 우리가 보는 것은 완전한 형상이 아니라 순간의 인상, 흔적, 잔상이다. 우리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세계를 온전히 붙잡으려 할수록 그것은 손 사이로 빠져나간다. 정들돌의 작업은 이러한 끝내 붙잡히지 않는 감각을 출발점으로 삼으며, 세계를 끝내 외면하지 않은 채 계속 더듬으려 한다.전시는 〈Hallo שלום مرحبא〉는(2024-2025)라는 서로 다른 언어의 인삿말로 시작된다. 외국어와 시, 파편적인 형상들은 종이벽 위에 겹쳐지지만 하나의 의미로 수렴하지 않는다. 〈편식가〉 시리즈의 여러 겹 종이와 안료가 쌓인 표면도, 〈its me. i am error mirror저예요. 제가 범인이에요. 제가 이 굴절을 만들어냈어요. 저는 에러 미러예요. 더러운 유리창이에요. 당신도 다르지 않아요.〉(2025)의 먼지가 내려앉은 거울도 대상을 선명하게 비추지 않는다. 이 작업들은 섬광처럼 대상을 잠시 드러냈다가 거두어 가며, 의미가 하나의 결론으로 고정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이러한 불완전함 속에서도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정면 돌파가 아니다. 〈찌루는 쇠 굽능 쇠 / 내가 든 빛나는 은색의 쇠는 칼인가 나는 너를 칼로 찌르지 않고 / 얇은 철사로 / 너의 흐름을 느끼고 / 그에 따라 구부리며 모양을 느끼고 싶다〉(2025)는 날을 세운 형상을 취하지만 쉽게 휘어진다. 이처럼 ‘비껴가는‘ 태도는 〈eallusgnaggnag〉(2025)에서도 드러나는데, ‘강강술래‘를 거꾸로 뒤집은 제목처럼 익숙한 공동체의 형식을 비튼다. 원고지 위 인물들은 조금씩 어긋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의 곁에 있다. 섬광 아래 잠깐 같은 공기를 나누는 몸들처럼, 완전한 합일에 이르지 않더라도 서로의 곁에 머문다.이번 전시에서 이 작품들은 하나의 거대한 설치를 이루기보다 각각 독립적으로 놓이며 서로 다른 호흡을 만든다. 관객은 작품 사이를 이동하며 각기 다른 감각의 파편을 이어 보게 되고, 그 보행 자체가 하나의 리듬을 형성한다. 이 안에서 정들돌의 작업은 어긋남과 흔적을 품은 채 계속 움직이는 몸의 태도를 제안한다. 그것은 박자를 정확히 맞추는 춤이 아니라, 끝내 하나의 답으로 수렴되지 않는 세계를 더듬고, 오해하고, 관계를 맺으려는 몸짓이다.

정들돌, 〈Hallo שלום مرحبا〉, 2024 – 2025, 혼합 종이(닥종이, 한지, 마분지 등), 흑연, 화이트젯소, 겔, 페이스트, 210 × 197 × 1 cm
©정들돌 Duldol Jeong

정들돌, 〈you are a picky eater but polyphagia. 너는 편식가, 그러나 잡식성이다.〉, 2025, 혼합 종이, 흑연, 화이트젯소, 겔, 페이스트, 188 × 142 × 1cm
©정들돌 Duldol Jeong (클로즈업 이미지)

정들돌, 〈I am a picky eater but polyphagia. 나는 편식가, 그러나 잡식성이다.〉, 2024, 혼합종이, 흑연, 유화, 먹물, 색연필, 103 × 118 cm
©박도현 Dohyun Park
최지우 Choi Jiwoo
최지우(b.2001)의 작업은 ‘두 다리는 지구 내핵에, 머리는 우주 끝에 닿아 팽팽하게 고정된 상태’라는 내면의 상상에서 출발한다. 그는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불완전한 상태를 길고 뾰족하게 늘어진 형상으로 풀어낸다. 이 형상들은 안정을 갈구하면서도 끝내 어디에도 닿지 못해 미완으로 남겨진 존재들이다. 그 뾰족한 실루엣 안에는 외부 세계에 깎여나가면서도 이 세계에 자신을 고정시키고자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이번 신작 〈탑〉(2026)과 〈탑 탈출기〉(2026)에서 그는 이 형상을 '탑'으로 확장한다. 탑은 불안 속에서 간절히 쌓아 올린 소망의 형상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공간은 주체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탑을 벗어나려 하지만 탈출하지 못한 채 그 안을 맴돈다. 시지프가 결국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처럼, 탈출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인물들의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끈질기게 버텨내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다.
탑 안의 시지프들
글 김유진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¹ 알베르 카뮈가 묘사한 시지프의 몸이다.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리지만 매번 굴러떨어지는 반복 속에서 카뮈는 의미를 원하는 인간과 끝내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충돌, 즉 부조리를 발견한다. 최지우의 탑 안에도 그런 몸들이 있다. 사다리를 오르고, 바닥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인물들. 끝이 보이지 않는 탈출을 반복하는 몸짓은 카뮈가 묘사한 시지프와 닮아 있다.〈탑 탈출기〉 (2026)의 탑은 불확실한 세계 앞에서 무언가를 붙잡고자 하는 열망이 쌓여 만들어진 형상이다. 그 안에서 길고 뾰족한 고깔을 얹은 인물들은 노래하고 춤추다가도, 이따금 사다리를 세우고 탑을 오르려 한다. 그러나 탑은 그들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높다. 간절히 쌓아 올린 공간이 결국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는 역설은 작가가 반복해서 그려온 길고 뾰족하게 늘어진 형상들과 같은 방식으로 읽힌다. 부조리한 굴레 속에서도 하루하루 몸짓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인물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하지만 이러한 반복은 단순한 비극으로 읽히지 않는다. 바위가 굴러떨어진 것을 알면서도 다시 내려가는 걸음 속에서,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탑 속의 인물들 역시 자신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놀고, 움직이고,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갇힌 조건을 직시하면서도 끝내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태도다. 카뮈가 말한 ‘행복한 시지프’인 것이다.그렇게 탑은 하나의 댄스홀이 된다. 탈출할 수 없는 공간에서도 노래하고 춤추는 인물들의 모습은 방향을 잃은 시대 속에서도 스텝을 멈추지 않는 인간의 모습과 겹친다. 확실한 목적지도 약속되지 않는 세계 안에서 몸은 다음 몸짓을 이어나간다. 전시가 말하는 '춤출 수밖에 없는 존재'란 완성된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알면서도 끝내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최지우의 작업은 바로 그 몸짓을 가리킨다.
¹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181.
굴레 속의 박동
글 이하나
화면을 사로잡는 불분명한 검은 실루엣은 거대한 산맥이나 무너진 탑의 잔해를 연상시키며, 기억 속 심리적 지형을 은유한다. 시간에 의해 불완전하게 침식된 기억처럼, 이는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현대인의 불안을 드러낸다. 이 척박한 공간 속 군상들의 움직임은 모순적이다. 탈출하려는 행위는 역동적이어야 마땅하나, 화면에는 오히려 정지와 체류의 기운이 짙다. 억압적인 구조를 끝내 돌파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삶을 견뎌내는 존재를 암시하는 듯하다.간절히 쌓아 올린 소망의 탑이 도리어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 형국이다. 결국 이곳은 폐쇄된 심연인 동시에, 자유로운 유영의 공간이 된다.이러한 정서는 에칭(Etching)과 아쿼틴트(Aquatint)라는 판화 매체의 물질성과 긴밀히 맞물린다. 에칭의 날카로운 선이 뼈대를 세우면, 아쿼틴트의 고운 입자는 이를 갉아내며 '구축'과 '쇠락'의 힘을 충돌시킨다. 동판 위에서 반복된 마모와 압착, 산화된 알갱이의 구조는 그 자체로 생생한 시간성을 증명한다. 이 지점에서 회색조의 층위는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수많은 흔적이 침전된 시간의 퇴적층이다. 작가가 언급한 ‘탑’의 본질 역시 이토록 고도로 응축된 물성에서 비롯된다. 예리한 바늘로 금속을 긁어내고 산(Acid)으로 파내는 공정은 부조리한 현실과 부딪히는 고통을 투영한다. 매끄럽던 표면이 깊은 홈으로 파이듯, 외부 압박에 깎여나가면서도 중심을 지키려는 몸부림이 거친 필선 속에 박동하고 있다.원하는 심도의 어둠을 얻기 위해 부식을 반복하는 최지우의 수행적 작업은,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숙명과 겹쳐진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속에서도 묵묵히 버텨내며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것. 이 작품은 출구 없는 세계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는, 우리 시대의 강인한 실존적 초상에 바치는 묵직한 헌사이다.

최지우, 〈탑 탈출기〉, 2026,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03:00, 반복 재생

최지우, 〈펼쳐진 세상〉, 2026, 하네뮬레 종이 위에 에칭, 아쿼틴트, 50 × 70 cm

최지우, 〈계속 자라난 3〉, 2024, B.F.K 판화지에 에칭, 아쿼틴트, 120 × 80 cm
김재우 Jaewoo Kim
김재우는 난독이라는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언어로 전부 설명되지 않는 불완전한 경험을 다매체로 풀어낸다. 인쇄물, 책, 사진 등을 활용하며, 문자와 세계 사이의 연결이 미끄러지거나 지연되는 경험에 주목한다. 작품 속 글자는 서로 충돌하며, 읽기와 이해 사이의 틈을 드러낸다.본 전시에서 선보이는 〈읽기 위한 염색체〉(2022-2024)는 책 형태의 상자 안에 알파벳이 새겨진 나무 블록과 염색체 그림을 배치한 작품이다. 관람자는 펼쳐진 책을 보았을 때 쉽게 이해 가능한 문자들의 조합을 기대하지만, 본 작품은 그러한 기대를 비튼다. 읽혀야 할 문자는 파편적으로 제시되며, 어긋나는 의미들을 산출한다. 또한 ‘GENETIC DISORDER’ 아래 놓인 염색체는 난독을 단순히 개인의 결핍이 아니라 신경학적 차원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나아가 관람자로 하여금 읽히지 않는 감각을 함께 경험해보도록 초대한다. 결국 김재우의 작업은 익숙한 읽기의 방식에서 잠시 벗어나, 읽기와 이해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틈을 환기한다.
읽기와 이해의 사이에서
글 한수빈
김재우(b.1994)의 작업은 난독이라는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단순한 결핍이나 장애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에게 난독은 읽기의 실패라기보다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감각의 조건에 가깝다. 흔히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지만, 사실 각자는 조금씩 다르게 읽고, 오해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구성하며 살아간다. 김재우의 작업은 바로 이 불완전한 읽기 속에서 발생하는 감각과 가능성을 다룬다.〈읽기 위한 염색체〉(2022-2024)에서 알파벳은 읽힐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문자와 염색체 이미지를 결합해 난독의 경험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 신체적이고 구조적인 조건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문자는 해독해야 할 정보라기보다, 익숙한 읽기의 과정을 멈추게 하는 낯선 구조로 제시된다. 관람자는 의미를 단번에 파악하기보다, 읽고 있지만 완전히 읽히지 않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한편, 〈보이는 침묵〉(2025)에서는 읽기의 문제가 몸의 언어로 확장된다. 수어에서 손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 문장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된다. 손끝의 움직임, 방향, 속도, 몸의 리듬은 소리나 문자와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때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라, 언어가 닿지 못한 뒤에도 계속 움직이는 감각의 공간으로 드러난다. 말해지지 않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보이고 전달된다.마지막으로 〈바벨탑〉(2023-2024)은 언어가 소통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를 다룬다. 쌓인 책들은 지식의 축적을 상징하는 동시에 번역과 오해가 함께 쌓여온 시간을 암시한다. 같은 문장도 언어가 달라지는 순간 뉘앙스가 달라지고, 어떤 의미는 남지만 어떤 감각은 사라진다. 이처럼 김재우의 작업은 읽기와 이해 사이의 틈을 감각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앞에서 관람자는 의미를 빠르게 해독하기보다,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머뭇거림 속에서 난독은 세계와 관계 맺는 또 다른 감각의 방식으로 다시 읽히게 되며, 익숙한 언어의 경계 바깥에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게 된다.

김재우, 〈읽기 위한 염색체〉, 2022 – 2024, 혼합재료, 가변크기
©김재우 Jaewoo Kim

김재우, 〈△□○ 신문〉, 2024, 신문에 콜라주, 50 x 70 cm (4EA)
©김재우 Jaewoo Kim

김재우, 〈△□○ 신문〉, 2024, 신문에 콜라주, 50 x 70 cm (4EA)
©김재우 Jaewoo Kim
듀킴 Dew Kim
듀킴(b.1985)은 종교, 퀴어성, BDSM, 대중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몸이 숭배되고 소진되는 방식을 탐구한다. 목사의 자녀이자 퀴어로 살아오며 마주한 감각에서 출발해, 신성함과 욕망 사이를 오가는 긴장을 조각과 설치, 영상 작업으로 풀어낸다.〈환호는 첫 번째 상처를 남겼다〉(2025)에서 뒤틀리고 꺾인 마이크 스탠드는 군중의 열광 속에서 복종과 침묵의 자세로 기울어지고, 이는 몸과 권력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이를 마주보는 작품 〈열광하고, 내리치고, 기도하라〉(2025)는 팬의 응원봉을 집착으로 변한 헌신의 흔적으로 치환하며, 공연장의 열광과 종교적 제의가 맞물린다.〈Just an Encore〉(2025) 연작에서는 렌티큘러의 시차 효과를 사용해, 아이돌의 몸과 종교적 희생양의 이미지를 불안정하게 교차시킨다. 여기서 환호성 속 무대는 군중의 요구 속에서 한 몸이 반복해서 바쳐지는 제단에 가까워진다. 듀킴은 이러한 환호와 상처 사이에도 끝내 다시 움직이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몸의 아이러니한 리듬을 포착한다.
구원은 없고 앵콜만이
글 이혜린
공연이 끝났다. 몸은 이제 겨우 멈춰 섰지만, 카메라는 마지막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헐떡이는 숨 사이로 웃음을 만들고, 떨리는 손끝으로 하트를 그린다. 가장 지친 순간에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이 순간을 ‘엔딩요정’이라 부른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객석 어딘가에서 다시 함성이 터져 나온다. 앵콜. 앵콜. 앵콜.듀킴(b.1985)은 바로 이 끝나지 않는 순간에 머문다. 공연장과 교회, 팬덤과 신앙은 그의 작업 안에서 놀라울 정도로 닮은 풍경으로 포개진다. 수많은 시선이 한 존재를 향해 집중되고, 무대 위의 아이돌과 제단 위의 성인은 군중의 믿음과 욕망이 투사되는 표면이 된다. 〈열광하고, 내리치고, 기도하라〉(2025)에서 응원봉은 마치 의례의 유물처럼 서 있으며, 높이 치켜든 팔과 반복되는 몸짓은 환호와 기도의 경계를 흐린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응원봉, 기도문처럼 반복되는 함성과 박수. 그 속에서 사랑은 곧 숭배의 힘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어 〈환호는 첫 번째 상처를 남겼다〉(2025)의 마이크 스탠드는 기괴하게 휘어진 채 서 있다. 목소리를 전달하던 장치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견디다 꺾여버린 몸의 자세를 닮는다. 듀킴은 사랑의 소리처럼 들리는 환호가 때로 몸을 밀어붙이고, 끝내 휘게 만드는 압력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한편 〈Just an Encore〉(2025) 연작에서는 무대가 끝난 뒤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공연은 종료되었지만 바깥에서는 여전히 함성이 들려온다. 퇴장을 준비하던 몸은 다시 밀려 나오고, 장면은 반복된다. 이곳에서 앵콜은 끝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수행해야 하는 현대인의 조건에 가깝다. 결국 듀킴이 포착하는 신체는 자유롭게 춤추는 몸이라기보다 멈출 수 없기에 계속 움직여야 하는 몸인 것이다. 환호와 침묵, 사랑과 폭력, 숭배와 소진 사이를 오가며 신체는 끊임없이 다시 호출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역시 비슷한 리듬 속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일이 다시 시작되고, 충분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또 다른 성취를 요구받는다. 우리는 언제나 다음 장면을 준비해야 하고, 다음 무대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구원이 아닌 앵콜. 종결이 아닌 반복. 듀킴의 작업은 그 멈출 수 없는 리듬과 끝내 잦아들지 않는 박수소리 속에 놓인 몸을 응시한다. 환호 속에서 상처 입고, 반복 속에서 소진되면서도 다시 무대 위에 서야 하는 몸. 그것은 무대 위의 누군가만이 아니라, 끝없는 호출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오늘날 우리 자신의 초상이지 않은가.

듀킴, 〈열광하고, 내리치고, 기도하라〉, 2025, 스테인리스 스틸, 블로운 유리, 소나무, 황동에 화이트 골드 도금, 비즈, 혼합재료, 100 × 30 × 103 cm

듀킴, 〈Soft Where the Stem Snapped〉,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주조 유리, 금속 체인, 혼합재료, 30 × 35 × 60 cm

듀킴, 〈No Messiah—Just an Encore〉, 2025, 렌티큘러 인쇄, 스테인리스 스틸, 37 × 56.5 × 6 cm
서혜림 Suh Hyerim
서혜림(b.1985)은 영상으로 쉽게 풀리지 않는 사적인 사건과 감정을 따라간다. 기록과 퍼포먼스를 함께 사용하며, 질문이 생기면 카메라를 들고 그 의문이 닿는 곳까지 가보려 한다. 사적인 관계와 스스로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에 관심을 두고, 때로는 가명을 사용해 익숙한 자신에게서 벗어난다.〈영원했으면 하는 건 무엇인가요?〉(2024)는 재개발로 인해 그가 운영한 예술공간 ‘가삼로지을’이 사라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퇴거 이후 그곳을 마주하지 못하였던 그는 펜팔 친구 하나 휴게듀어에게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찾는다. 건물에 남겨진 종이별에 단어를 적어 내려가는 행위는 사라질 장소에서 기억을 남기고 관계를 이어보려는 작은 의식이자, 자신만의 작별 방식이 된다.그는 정해진 결론보다 촬영 중 우연히 돌아오는 답과 사람 사이의 닿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다큐멘터리와 기록을 바탕으로 퍼포먼스와 무빙 이미지의 경계를 오가며, 개인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감각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찾고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영원에 가닿는가
글 강민
영원했으면 하는 건 무엇인가요?〉(2024)는 서혜림이 직접 운영하던 4평 남짓한 예술공간 '가삼로지을'이 을지로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영상은 공간을 구하던 순간부터 자유롭게 갤러리를 꾸려가던 나날을 지나, 3년을 함께한 공간과의 작별을 앞둔 작가의 모습으로 흘러간다. 작가는 이미 비워진 건물에 다시 찾아가 잠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이웃에게 받은 물로 물총을 채워 벽과 사방에 다정하게 쏘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고, 옆방에 혼자 살던 할아버지가 접었다고 믿는 종이별들을 벽에 붙여 저마다 영원하다고 믿는 단어를 만드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공간을 떠나보낸 뒤, 건물은 무너진다.이 모든 행위는 재개발이라는 현실을 결코 뒤집을 수 없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몸짓이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접었다고 믿는 종이별조차 그들만의 상상이자 다짐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모를 뭉클함이 남는다. 변하지 않을 단어를 고르는 장면에서 작가의 친구는 '기억'을 이야기하고, 작가는 "죽으면 끝이잖아"라고 답한다. 친구는 놀라며 "그것보다 더 영원해야 해?"라고 되묻는다. 작품은 무엇이 영원한지 묻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무엇이 영원하기를 바라는지를 묻는다. 하찮아 보이는 그들의 몸짓이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을지라도, 그 몸짓을 나누는 동안만큼은 이별을 맞이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놓았을지도 모른다.벽에 붙은 네 개의 단어, 기억, 꿈, 나, 흔적. 저마다 영원하길 바라며 고른 말들이지만, 그중 무엇도 영원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의미를 새긴다. 거대한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그 흐름 안에서 저마다의 몸짓으로 살아내는 일. 그 몸짓이 끝내 영원에 닿지 못한다 해도, 유한한 우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한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유한한 인간이 영원에 다가가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 아닐까. 이 작품 앞에 선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은 무엇으로 영원에 가닿으려 하는가.



서혜림, 〈영원했으면 하는 건 무엇인가요?〉, 2024, 다큐멘터리, 컬러, 사운드, 00:30:00
손예인 Yein Son
손예인(b.2000)은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회화를 오가며 움직임이 남기는 궤적을 따라간다. 그 형상은 작가가 직접 뜬 종이 위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펼쳐지고 접히며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된다. 그는 춤의 동작을 받아 적듯 인체의 움직임을 한 동작씩 따라가며 기록하고, 몸이 지나간 길과 그 둘레의 공간이 종이 위에서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여러 지점에서 진입할 수 있는 큰 화면 앞에서 관람자는 종이 한 모퉁이에서 출발해 궤적을 더듬더듬 따라 읽어간다.손예인이 따라가는 움직임은 두 결로 나뉜다. 〈Border〉(2026)처럼 한 사람의 발걸음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인간의 한계와 경계 끝을 향해 가기도 하고, 철새 연작처럼 무리의 새들이 지면의 허락 없이 시차와 하늘의 경계를 넘어 날아오르기도 한다. 이 움직임은 화면에 자국을 새기며 흔적과 정체성을 남기는 과정으로 놓인다. 흔들리는 무대 위에서도 멈추지 않는 발의 박자가 다음 한 걸음을 내딛는 몸의 리듬으로 이어지며 화면 안에서 펼쳐진다.
감각과 기억이 쌓여가는 과정
한효진
걸어가는 발이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손이 되어 있다. 손예인의 〈Border〉(2026)를 보는 일은 이런 헛디딤의 연속이다. 150 × 200cm 한지에는 들어갈 문이 따로 없어서 눈은 아무 데나 짚었다가 형상을 놓치고 다시 짚는다. 색도 사람을 붙들어 두지 않는다. 갈색인가 하면 파랑이 비치고, 그 둘은 끝내 어느 쪽으로도 굳지 않는다. 어디가 칠해졌고 어디가 비었는지, 한 색이 어디서 다른 색에게 자리를 내주는지조차 확언할 수 없다. 손예인의 화면에는 가르는 선이 없다. 형상은 다른 형상으로 흘러들고 색은 옆 색에 스미고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는 진작 지워져 있다. 〈Border〉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화면이 결국 그어 주지 않는 바로 그 선이다. 그림 앞에서 관객이 줄곧 하는 일은 그 선을 자기 손으로 그어 보려는 안간힘이다.선이 사라지는 일은 시간에서도 벌어진다. 작가는 0.1초짜리 순간을 한 장씩 쌓아 그림 한 귀퉁이에 작은 화면을 영사한다. 〈눈꺼풀〉(2025)이다. 한 장과 다음 장 사이에는 늘 흔들림이 끼어들어 둘을 가르는 자리에 메운다. 큰 그림은 가만히 있는데 그 위에서 눈꺼풀만 감겼다 뜨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마저 흐려 놓는다.가로가 6미터인 〈웅웅거리는 회색 밤이 들린다〉(2025)의 거친 한지 표면은 시선을 자꾸 붙잡아 세우고, 눈은 멈췄다 미끄러졌다 하며 화면을 더듬어 나아간다. 화면 속 누군가의 발은 어딘가의 끝을 향해 걷는 중이다. 그 걸음은 작가가 실제로 건넌 것이다. 영하 20도의 스웨덴 북단, 빛 한 줄기 없는 어둠 속에서 끝을 모르는 설산을 넘어 걷고 또 걸었다. 눈은 떠도 감아도 같은 흑색이고, 귀에는 웅웅거리는 바람뿐이다. 제목은 그 소리와 답답함, 찬 공기를 욱여넣은 말이다. 그 밤의 선은 하나, 하늘과 설원이 맞닿던 수평선이었다. 그마저 그림에서는 풀려 있다. 발이 향하는 끝에도 선은 없다.손예인의 그림에는 마지막 획이 없다. 그래서 그림은 끝나는 자리 없이 계속 움직인다. 작가의 말대로 그것은 “감각과 기억이 쌓여가는 과정”이고 더듬더듬 건너온 시선까지 그 위에 한 겹으로 얹히는 것이다.
철새들의 나침반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글 정세빈
미숙하고도 서툰 인간들은 기록을 남긴다. 의도적으로 남겨진 것일까? 작가는 인간 삶의 흔적 자체를 기록으로 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겨진 기록들은 이야기를 만든다. 때론 한없이 가볍지만 때론 한없이 무거운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이야기는 더듬더듬 여기서부터 저 너머 어딘가로 저마다의 장단을 맞춰가며 펼쳐진다. 이것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이다.이렇게 축적된 이야기들은 세상의 수많은 규칙과 경계를 넘나들며 과감하게 질서를 거스르기도 하지만 곧장 다시 흐드러지고 무너지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들은 스스로의 방향성을 잡고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 선택권을 갖는다. 그렇다면 자연이 만들어내는 리듬, 그것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어떠한가?〈백야〉(2026),〈설야〉(2026),〈떠오르는 밤〉(2026)은 철새들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작가의 연작으로, 비인간과 자연의 순환이 형성하는 경계넘기를 보여준다. 이들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대륙과 시간을 넘어 자연스레 어딘가로 떠나고 돌아온다. 인간들이 경계를 넘나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움직임이다. 철새들은 자연이 보내는 신호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타의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들 같다가도,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파괴할 수 없는 질서와 경계를 자유롭게 거스르며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처럼 인식된다. 작가는 쌀쌀한 겨울날 북쪽 끝 철원의 할머니 댁 근처 논과 밭에서 두루미 떼들을 만나곤 했다. 그보다 더 북쪽에서 넘어온 두루미들은 추위를 피해 왔다고 하지만, 작가에게는 겨울이 찾아왔다며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존재들이었다. 계절과 날씨마저도 상대적인 것임을 철새들의 움직임은 조용히 드러낸다. 반가운 이들이다.‘춤’은 본래 리듬과 몸, 지면의 허락이 모두 이뤄져야 가능한 몸짓이다. 반면 철새들이 보여주는 그들의 몸짓은 지면의 허락 없이도, 인간들이 만들어낸 시차의 경계를 넘어서도 날아가고 리듬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소통 방식과는 다른 자연의 본능적 언어에 귀 기울이는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퍼포먼스이다.

손예인, 〈웅웅거리는 회색 밤이 들린다〉, 2025, 한지 위에 과슈, 조개껍데기 가루, 흑연, 오일, 600 × 210 cm

손예인, 〈떠오르는 밤〉, 철새 시리즈, 2026, 제작 종이 위에 오일,과슈,먹,흑연,조개껍데기 가루, 27.5 × 22.5 cm

손예인, 〈설야〉, 2026, 철새 시리즈, 제작 종이 위에 오일,과슈,먹,흑연,조개껍데기 가루, 27.5 × 22.5 cm
신종찬 Shin Jongchan
신종찬(b.1996)은 세종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서양화과와 작업실을 공유하던 환경은 그에게 매체 고유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었고, 한국화의 문법과 그 바깥을 동시에 사유하게 했다. 전통 한국화에서 종이가 먹을 받아주는 바탕이라면, 그의 작업에서 이 관계는 역전되며 한국화의 오랜 문법을 안으로부터 비튼다. 먹으로 물들어 공간에 고정된 한지는 스스로 선이 되어 공간을 유영한다. 규범에 저항하기보다 매체와 합의하며 전례 없는 형식을 열어가는 것이다. 신작 〈마마와 산데비스탄〉은 핵역입·중봉·삼중 등 필법의 최소단위를 조각화하고, 여러 조각으로 다시 하나의 형상을 만드는 순환적 구조를 공간으로 확장한다. 제목 'მამა'는 조지아어로 소리는 마마, 뜻은 아빠, 문자의 형태는 서예의 필획이라는 세 번의 우연적 일치를 지닌다. 최소단위에서 덩어리로, 다시 최소단위로 순환하는 작업의 조형적 구조를 작가는 '양의적인 탈출구'라 부른다. 음성과 문자의 뜻이 엇갈리듯, 조형적 기원과 파생 또한 방향을 확정하지 않는다.
자립하는 선(線)
글 최민서
신종찬(b.1996)은 한국화의 매체를 고수하되 그 문법을 뒤집는다. 전통 한국화에서 종이가 먹을 고정시킨다면, 그의 작업에서는 먹이 종이를 고정시킨다. 한지를 녹여 먹과 아교를 먹이고 굳힌 검은 덩어리는 더 이상 화면 위에 그려진 선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는 수묵의 선 그 자체다. 평면의 환영에 종속된 서양 회화의 두꺼운 마티에르와 달리, 그의 조형은 지지체에서 풀려나 공간으로 걸어 나온다. 그렇게 평면이던 그림은 입체가 되고, 입체는 다시 주어진 공간을 어떻게 점유할 것인가의 문제로 옮겨간다.이 전치의 동력은 '물질'이다. 그는 정신성으로 환원되곤 하는 수묵추상의 논리에 물음표를 달고, 용구의 운용이라는 한국화의 핵심을 몸으로 옮긴다. 붓이 곧 그의 몸이며, 온몸으로 종이를 반죽하는 신체가 용구가 된다. 그가 빌려온 인도유럽어의 중동태(행위가 행위자 자신을 향하는 상태)는 이 작업의 구조를 정확히 짚는다. 신의 자리에 매체를 놓으면, 작가는 자유롭게 작업하되 오직 매체가 허락한 한에서만 움직인다. 선택한 재료에 의해 도리어 선택되는 역설이다.그의 작업은 두 발로 걷는 일에 비유된다. 한 발이 역사와 장르를 탐독해 짜놓는 철학적 방법론이라면, 다른 발은 재료를 다루는 물질적 방법론이다. 두 발의 보폭은 좀처럼 맞지 않는다. 물질이 생각을 앞질러 달아날 때 그는 설정을 고쳐 다시 맞추고, 그 어긋남을 동력 삼아 한 걸음씩 나아간다. 처음 계획한 작업과 실제로 만들어진 작업의 간극에서 그가 거듭 발견하는 것은 매체가 허락하지 않은 자리이다. 어긋남은 실패가 아니라 매체가 작가에게 건네는 응답인 셈이다.그에게 한국화의 핵심은 끝내 용구의 운용, 곧 필획이다. 역입과 중봉으로 붓을 가다듬는 미세한 왕복을 그는 조형의 최소단위로 포착해 리듬을 길어 올린다. 형상을 모사하는 일이 아니라 붓을 다루는 태도 자체를 조각하는 일이다. 동시에 그는 '말이 된다'는 말을 경계한다. 말이 되는 것을 만들 거라면 글을 쓰면 그만이다. 말이 안 되는 것들을 엮어 끝내 형식으로서 말이 되게 만드는 일, 그가 이해하는 미술의 자리다.결국 그의 작업은 미술사의 한 지점에 핀을 꽂아 동시대로 불러내는 일이다. 장르적 정합성과 물질적 방법론 사이에서 그는 손쉬운 양자택일을 거부하며, 그 둘은 머릿속 마인드맵에서 끝내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화면에 새겨지는 동세가 곧 '그림을 그리는 나'의 연속동작이라는 작가의 말은, 작업과 작가가 분리되지 않는 이 태도의 가장 정직한 요약이다.
먹과 종이와 붓의 기억 - 기억의 정원에서
글 이상익
근래 미술작품을 논하는 기준은 작가의 삶의 경험과 결부되어 왔다. 작가는 예술가라는 운명을 쥐고 살아가는 탓에 표현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어느새 근자의 미술은 작가의 열정과 사상 위에 조형을 쌓는 공간적 예술이라는 원칙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이것은 미술이 발전해 온 방향의 갈래라고 할 것이며, 과거 대가들이 몰두했던 재료의 완전한 통제와 운용 위에서 작가적 표현을 쌓는 작업은 이제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이런 상황 속에서 신종찬(b.1996)의 작업은 미술의 진실을 재료와 매체로 탐구한다. 그는 한국화를 그린다. 종이과 먹으로 조형을 획득했던 동양화단의 모든 시도는 곧 그의 매체로 존재한다. 필법, 재료의 운용, 붓 앞에서의 마음가짐을 수련한 끝에 그는 원하는 조형을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화가 허락하는 한에서 존재한다. 작가에게 재료가 허락하지 않는 조형은 손이 나가지 않는다. 그에게 매체란 기억이고, 재료에 없는 기억은 조형으로 등장할 수 없다.따라서 〈마마와 산데비스탄〉(2026), 〈마마(მამა)〉(2026)(입체), 〈마마(მამა)〉(2026)(회화), 〈샘〉(2026)의 네 작업은 틀림없는 한국화다. 이것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섣불리 조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르다. 실제 공간 속에서 종이와 먹은 선으로 치환된 질량을 통해 물질로 존재한다. 회화 〈마마(მამა)〉가 전시장의 벽과 마주보는 조건 속에서 〈마마와 산데비스탄〉, 입체 〈마마(მამა)〉, 〈샘〉은 두 평면 사이에 있다.네 작품은 회화에서 출발한 조형이 공간을 점유하면서 벽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직교한 벽으로 감입되면서 전시장 전체를 단일한 평면으로 만든다. 이때 시점과 종점의 구분은 관람자의 몫이다. 중요한 것은 평면에서 출발한 조형이 평면으로 들어가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관람자는 작품 사이를 길처럼 거닐게 되고, 자연히 수묵화를 와유(臥遊)하는 개인이 된다. 매체가 허락한 조건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다시 와유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다.이렇게 네 작품은 매체의 기억을 작가의 열정으로 조형해낸 오롯한 정원으로 서있다. 정원을 거닐면 먹이 종이에 스며들듯 매체가 직조한 기억이 스며든다. 호소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정원의 끝에서 결국 밀려올 따름이다.

신종찬, 〈마마(მამა)〉, 2026, 캔버스에 한지, 먹, 숯, 97 × 193.9cm
신종찬, 〈마마와 산데비스탄〉, 2026, 한지, 먹, 숯, 가변크기
©나세연

신종찬, 〈마마와 산데비스탄〉, 2026, 한지, 먹, 숯, 가변크기
신종찬, 〈마마(მამა)〉, 2026, 한지, 먹, 숯, 가변크기
신종찬, 〈샘(Gland)〉, 2026, 한지, 먹, 숯, 가변크기
©나세연
이가은 Gaeun LEE
이가은(b.2002)은 신체가 세계와 맞닿는 순간을 퍼포먼스로 탐구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다. 그는 발목 부상과 재활의 과정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된 몸을 세계와 자신을 연결하는 통로로 재인식하며, 불안정한 움직임과 그 흔적을 작업의 중심에 놓는다.실내 퍼포먼스 〈어떤 것은 언제나 불충분하다〉(2024)는 수술 이후에도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살아가는 감각을 드러낸다. 기울어진 판 위에서 균형을 붙잡으려는 긴장과 사투는 몸에 부착된 연필심을 통해 흔적을 남긴다.실외 퍼포먼스 〈땅 위에서 비스듬하게〉(2025)는 그 이후의 시간을 비춘다. 그는 불완전한 신체를 매개로 다양한 장소에서 바닥과 흙, 주변 사물과 즉흥적으로 접촉하며, 세상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감각을 선보인다.그의 움직임은 부상 이전의 ‘정상적인’ 몸으로 회복하려는 시도라기보다 변형된 신체와 함께 새로운 리듬을 익혀가는 과정이다. 불안정한 균형과 치우친 자세, 바닥과의 접촉은 결함이라기보다 세계와 관계 맺는 또 다른 방식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은 그렇게 나아간다
글 박서윤
우리는 각자의 사정으로 살아간다. 스스로만이 아는 결핍과 비틀림으로 흔들리며 살아간다. 댄스홀의 춤사위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우리를 강타하는 섬광은 때로 통증처럼 선명히 느껴지기도,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동으로 머문다. 이가은의 작업은 이처럼 눈앞이 아득한 감각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단순 부상이라 여긴 발목의 통증은 MRI 상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채 수개월간 몸집을 부풀렸다. 그가 그 고통에 신체를 순응시킬 즈음, 대학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그 부상이 공식화된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이전의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아픈 발로 지지하지 않는 데에 이미 적응되어버린 몸은 수술 후에도 자꾸만 비스듬히 섰다. 이 불균형한 신체는 다른 사람들이 숨 쉬듯 취하는 동작을 벅차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떤 것은 언제나 불충분하다〉(2024)는 그가 이러한 자신을 마주하고, 드러내는 기록이다. 그는 자신의 몸처럼 왼쪽으로 기울어진 판 위에서 균형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그 몸부림은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겨진다.치우친 지평 위에서의 긴장은 〈땅 위에서 비스듬하게〉(2025)에 이르러 해소된다. 1년간 그는 이 몸이 오히려 세계와 자신을 잇는 유일한 통로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방 한 켠에서 벗어나 완전히 낯선 공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 사물과 즉흥적인 관계를 맺는 신체는 그에게 이 결핍된 몸이 세상을 지각하는 유일한 매개임을 환기한다. 그는 몸으로 세상을 알며, 세상으로 몸을 인지하는 것이다.불안정한 신체를 탐구함에서 시작된 그의 작업은 불안정한 신체와 함께함으로 지속된다. 견디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새로운 사용법을 작성해나가는 태도는 댄스홀 내 모두와 공명한다. 세상의 눈부신 순간 속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그 진동이 우리에게 영구적인 흔적을 남길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끝내 몸을 멈추지 않는다. 완전히 균형 잡히지 않은 채로도 다시 발을 내딛는다. 기어코 고유의 리듬을 맞추어내기 시작한다.
걸음마는 떼기 전이 제일 완벽하다
글 안준태
이가은은 실내외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세계를 마주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제시했다. 두 발로 온전히 서있는 것이 박탈된 상태의 신체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지 작가는 수없이 넘어지고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대답한다. 그는 수술 이후 비틀거리는 몸을 바라보며 이전의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그리워했다. 걷고 서는 일조차 낯설어진 몸은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땅을 피하는 동작, 다친 발을 사용하지 않는 몸의 습관은 다시 춤이 되어 그의 퍼포먼스로 돌아왔다.그는 불균형한 몸을 불균형한 조건 위에 다시 배치하며, 몸이 세계와 맞물리는 방식을 새롭게 조율한다.〈어떤 것은 언제나 불충분하다〉 (2024)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연필심을 쥔 채 흰 종이 위를 애써 짚어나간다. 이 수행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수행이 완전해질 수 없기에 그의 몸은 역설적으로 세계와 직접적으로 맞닿는다. 기울어진 판 위에서 한쪽으로 쏠리는 몸과 그 균형을 잡으려는 긴장, 그리고 계속해서 무너지는 몸은 실패의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으로 향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퍼포먼스 작업에 연필을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드로잉의 가장 기초가 되는 재료인 연필심은 때로는 엇나가고 다른 방향으로 그려질 때도 있지만, 그 흔적 하나하나가 모여 종이 위에 남겨진 몸의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전시 공간 중앙에 자리 잡은 널찍한 종이는 몸이 세계와 맞닿으려는 노력이 축적된 흔적으로 관객과 마주한다.불안정 이전의 안정을 갈망하던 그의 태도는 이제 불안정 이후의 안정을 찾아가는 몸짓으로 변화한다. 그는 세계와 교감하는 가장 기본적인 매체인 몸을 통해 불안정 이후의 삶을 찾았다. 걸음마는 떼기 전이 가장 완벽하다. 아직 비틀거리지 않았고, 아직 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와 넘어지지 않으려는 발버둥은 그 완벽함의 바깥에서 다음 스텝을 밟는다. 비틀거리고 무너지는 몸은 결핍된 몸이 아니라, 다시 세계에 닿기 위해 움직이는 몸이다. 그에게 회복은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닌, 불충분한 몸으로도 걸음마를 떼는 일이다.

이가은, 〈어떤 것은 언제나 불충분하다〉, 2024,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00:02:15

이가은, 〈땅 위에서 비스듬하게〉, 2025, 4K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00:02:15

이가은, 〈‘어떤 것은 언제나 불충분하다’ 퍼포먼스 기록물〉, 2024, 종이에 연필심, 148.0 × 79.5 cm

이가은, 〈040723〉, 2024, 종이책, p.71, 14.8 × 21.0 cm
안진선 JIN SEON AHN
안진선(b.1996)은 도시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불안과 진동이 공간 인식과 신체 경험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이는 건축 구조물과 일상의 재료를 기반으로 한 조각적 상황으로 연출되며, 관람자로 하여금 익숙했던 도시의 균형을 의심하고 공간의 물리적 안정성을 고찰하도록 이끈다.전시장은 이를 감각하는 두 갈래의 지형으로 구분된다. 〈책장〉(2025), 〈서랍장〉(2025), 〈함석 닥트〉(2025)는 사물의 일상적 기능이 정지된 날것의 물성과 구조를 전면으로 드러내며, 도심 속 요소를 전시장 안으로 전유하여 낯선 긴장을 형성한다. 반대편의 〈접고 펼치는 흔적〉(2025), 〈고가다리〉(2023), 〈도시 모형 실험〉(2024)에는 방문자의 몸짓과 작가의 다각적 시점이 스며있다. 결속과 이완, 견고함과 임시성이 공존하는 지형에서 관람자는 능동적으로 개입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이 과정에서 불안은 더이상 부정이 아닌 하나의 상태로서 자리하며, 신체를 경유한 진동은 이내 저마다의 움직임을 지속해 나간다.
균열을 지나는 몸
글 오연서
우리는 도시를 직선으로 걷지 않는다. 좁은 틈을 비켜 지나고, 기울어진 길 위에서 균형을 조정하며, 예상치 못한 장애물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이 몸짓들은 대부분 의식되지 않지만,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도시와 교섭한다. 안진선(b.1996)은 도시에 남겨진 흔적과 구조물의 잔해를 통해 이러한 미세한 균열을 읽어낸다. 그에게 도시는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조정되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그의 조각은 이에 축적된 긴장과 진동을 새로운 구조로 번역한다.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멈춰있는 균열을 마주한다. 〈책장〉(2025)과 〈서랍장〉(2025)은 본래의 기능적 전제를 상실한 채 놓여있고, 〈도시 모형 실험〉(2024)에서는 거대한 도시가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로 옮겨져 나란히 진열된다. 언뜻 멈춰선 듯한 조각은 새롭게 조형된 면과 선으로 구성되어 잠재된 움직임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관객은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이 붕괴되는 경험을 하며 불안을 감지한다. 그러나 이 불안은 그저 하나의 상태에 머무를 뿐이다. 작품이 만들어내고 있는 경험과 움직임은 묵묵히 놓여 있으며, 관객은 그 앞에서 도시가 품고 있는 진동을 천천히 감각하게 된다.이 진동은 〈접고 펼치는 흔적〉(2025)에서 관객의 몸으로 확장된다. 도시의 흔적들이 드러난 외피는 이동과 변형의 가능성을 품은 바퀴와 병풍형 구조로 이어진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몸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조각과 관계 맺는다. 작가는 타인과의 교류가 필연적인 형태를 통해 도시에 내재한 긴장과 진동을 개별적인 감각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몸짓으로 작품에 참여하는 관객은 각자의 리듬 속에서 낯선 움직임을 감각하며, 불확실한 균형 위에서 자신의 위치와 시선을 갱신한다.가까이 다가가고, 물러서고, 밀어내는 과정 속에서 관객의 몸은 조각과 부딪힌다. 도시의 진동은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 전시장 안으로 번져 나가고, 서로 다른 몸짓은 새로운 리듬을 형성한다. 미세한 균열을 감지하는 감각은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작동한다. 작가가 포착한 진동은 전시장을 벗어난 이후에도 우리의 걸음 사이를 오래도록 맴돌며, 일상의 움직임 속에 또다른 박자를 만들어 낸다.
임시적 지형과 도시의 진동
글 양정원
안진선은 도심의 요소들을 전시장 안으로 전치한다. 작가가 주목하는 도시는 공사장과 도로처럼 안과 밖, 위와 아래, 고정과 이동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틈새의 영역이다. 이때 도시는 주체의 신체가 가장 익숙하게 길들여진 공간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내부의 불안을 통제하는 견고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전시장의 어긋난 지형을 따라 이동하는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구조적 혼란과 마주한다. 단단해야 할 구조물은 어째서인지 허술하며,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들은 예상 밖의 견고함을 내보인다. 고정되어 있어야 할 건축적 경계인 바닥과 벽, 천장, 그리고 사물들이 작가의 임시적 조합에 의해 흔들리고 재정의된다.〈책장〉(2025), 〈서랍장〉(2025), 〈함석 닥트〉(2025)는 모두 일상적 기능을 전제로 하는 구조에서 출발하지만, 이제 더 이상 본래의 쓰임을 수행하지 않는다. 도시가 견고함을 유지하는 방식이 사물의 기능적 전제에 있다면, 안진선은 그러한 전제를 해체하며 사물이 가진 가공되지 않은 물성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기능이 멈춘 자리에는 이처럼 지지와 압력, 무게와 균형의 관계만이 남아 있다. 형태적 임시성과 물성의 무게감이 자아내는 역설은, 건축적 질서와 물질적 중력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특유의 긴장을 형성하며 하나의 구조 안에서 공존한다. 이러한 조각적 긴장은 가변적인 구조물 사이를 통과하는 관객에게 물리적인 압박과 지탱의 감각으로 전환된다. 관객은 이 불안정한 지형을 스치고 통과하며 물질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몸으로서 체감한다.〈도시 모형 실험〉(2024)은 도시를 바라보는 시점의 문제를 전면화한다. 가까운 것과 멀리 보이는 것, 부분과 전체를 오가는 시선 속에서 도시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되고 재배열되는 상태로 나타난다. 한편, 안정적인 형태 속에서도 긴장을 유지하는 〈고가다리〉(2023)를 비롯한 작업들은 완전히 고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흔들리며, 관객으로 하여금 익숙했던 도시의 완결성을 의심케 한다.공간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진동은 신체를 거쳐 다시 공간으로 스민다. 공간의 진동이 신체로, 주체에서 출발한 불안은 공간으로, 공간의 불안이 다시 신체로 전이되는 이러한 순환 속에서 안진선의 조각은 견고해 보였던 세계의 균형을 뒤흔들며, 관람객의 신체 감각을 조정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완결된 시스템의 틈새를 파고드는 이 흔들림은 결국 단단한 도심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매일 딛고 서 있던 도시의 진동을 전시장 안에서 생생히 마주하게 한다.

안진선, 〈책장〉, 2025, 무늬가 있는 합판, 우드스테인, 목공용 물감, 190 × 40 × 60 cm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 ©고정균

안진선, 〈함석 닥트〉, 2025, 함석, 180 × 50 × 70 cm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 ©고정균

안진선, 〈접고 펼치는 흔적〉, 2025, 자작나무 합판, 경첩, 바퀴, 흔적을 만드는 생활 용품, 가변크기(75 x 25 x 180 cm)
©서남예술촌

안진선, 〈도시 모형 실험〉, 2024, 혼합재료, 벽면 선반 위 가변설치
©서울시립미술관
윤대원 Yun Daewon
윤대원(b.1993)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신체와 디지털 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변이를 탐구한다. 춤과 움직임에 대한 오랜 관심을 출발점으로, 그는 비디오·퍼포먼스·인터랙티브 매체를 넘나들며 가상의 몸짓과 비접촉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 조건을 실험해왔다. 그에게 신체란 매개와 변환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형태를 달리하는 과정 그 자체이며, 작가는 그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신체의 상태 안에서 지각과 관계의 가능성이 어떻게 열릴 수 있는지를 묻는다.<for Daniel Linehan>(2023)은 빠르게 회전하는 자신의 몸을 담은 영상과, 그 동작을 분절한 영상으로 구성된 2채널 작업이다. 통제하기 힘든 속도로 돌아가는 몸은 디지털 화면 속에서 점차 온전한 윤곽을 잃고 움직임의 흔적과 잔상만을 남긴다. 작가는 자기 몸을 가장 가까운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을 매체 안에서 증폭하고 분열시키는데, 이는 몸이 이미지로 환원되는 과정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그 해체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본질을 마주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신체의 물리적 조건과 디지털 매체의 변환 사이에서, 지각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탐색한다.
맞닿지 않고도 이어질 수 있다면
글 김신
몸은 사라지지만 움직임은 남는다. 움직임은 사라지지만 감각은 전염된다. 윤대원의 작업은 바로 그 감각의 잔여와 순환의 영역을 탐색한다. 그에게 춤은 무대 위에서 완결되는 시각적 행위가 아니다. 안무된 동작이나 기술적 수행 이전에, 춤은 몸들이 서로를 감지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순간에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윤대원은 춤을 개인의 주체적 표현이 아니라, 몸과 몸 사이를 오가는 감각의 흐름이자 타자의 흔적을 경유시키는 매개로 이해한다.〈for Daniel Linehan〉(2023)은 하나의 원본을 재현하는 대신 타인의 움직임을 자신의 몸으로 통과시키는 과정에 집중한다. 몸짓은 그대로 복사되지 않고 각자의 신체를 경유하며 미세하게 어긋나고 변형되며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작가에게 춤은 개인의 표현이 아니라 타인의 흔적을 받아들이고 다시 내보내는 순환의 과정이다. 몸은 하나의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감각이 일시적으로 머물다 가는 유동적인 매개체가 된다.이러한 신체의 매개성과 유동성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라는 조건과 결합하며 인간 중심적 경계를 한 단계 더 넘어선다. 카메라와 스크린, 데이터 네트워크 속에서 신체는 고유한 물리적 부피와 윤곽을 박탈당한 채, 오직 속도의 궤적과 잔상으로만 존재하는 비인간적 물질로 변형된다. 〈빙글뱅굴〉(2023)에서 반복적으로 회전하며 중심을 잃고 늘어나는 신체는 고정된 유기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해체되는 흐름 그 자체다. 스크린 위에 평평하게 정렬되는 인간과 비인간, 텍스트와 신체의 데이터들은 위계 없이 뒤섞이며 물질 고유의 생동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윤대원의 작업에서 가상은 현실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허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몸이 기존의 물리적 제약을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고 관계 맺을 수 있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생태계다. 그의 춤은 접속과 전송, 왜곡과 공명을 통해 끊임없이 증폭되는 움직임의 네트워크에 가깝다. 그리고 그 변형의 스크린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고정된 경계를 잃고 흘러내리는 우리의 몸들은, 이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과연 어디까지 확장되고 이어질 수 있는가.
휘어지고 베베 꼬이는 기괴한 춤
글 이경민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는 일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이 되었다. 화상 통화 속 얼굴이 필터로 뒤틀리거나, 신호가 끊겨 화면이 깨지는 일도 더는 낯설지 않다. 각기 다른 공간에 놓인 몸들은 카메라 너머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직접 맞닿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섞이지 않는 채로 같은 장면을 잠시 공유한다. 윤대원은 이 익숙해진 감각 속에서 다시 몸에 주목한다. 그에게 신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휘어지고 뒤틀리며 재구성되는 과정 그 자체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몸이 어떻게 지각되고 타자와 관계 맺는지를 탐색하는 일이 그의 작업의 중심에 놓여 있다.〈for Daniel Linehan〉(2023)에서 작가는 회전하는 자신의 몸을 촬영하고, 그 동작을 분절해 두 화면에 동시에 펼쳐 보인다. 디지털 필터를 거치며 회전의 잔상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그 과정에서 몸의 실체는 지워진 채 잔상만 남는다. 화면 속 신체는 점차 윤곽을 잃고, 화려하지만 속이 비어버린 껍질처럼 드러난다. 그는 자기 몸을 매체 안에서 증폭하고 분열시킴으로써, 형상이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려 한다. 이 질문은 〈빙글뱅굴〉(2023)에서 개인의 몸을 넘어 여러 참여자들의 몸으로 확장된다. 여덟 개의 세로 화면 속에서 참여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개별적으로 회전한다. 디지털 필터를 거치며 몸의 실체는 지워지고, 회전하는 잔상만이 화면을 채운다.이 여덟 개의 화면은 서로를 마주보는 구조로 설치되어, 관객을 그 한가운데 세운다. 여덟 방향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회전의 잔상은 전시 공간 자체를 어둡고 어지러운 댄스홀처럼 만든다. 여기에 참여자들의 목소리가 거꾸로 흘러나온다. 몸과 마찬가지로 목소리 역시 하나의 신체다. 뒤집히고 회전하며 기술을 통과하는 순간, 목소리는 뜻을 잃고 리듬만 남은 채 더 극적으로 변형된다. 변형된 몸과 목소리가 동시에 밀려오는 이 공간에서, 관객은 이질적이고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이 해체와 변형 속에서 오히려 그는 실체의 소멸이나 상실이 아닌, 몸의 지속적인 의지를 역설한다.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그 관계로부터 유예되는 상태 — 완전히 닿지도,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는 이 이중적인 자리에서, 각자의 고독과 사정을 지닌 채 같은 리듬을 잠시 나누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곁을 지나고 부딪히는 것 — 그것이 그가 말하는 공존의 형식이다.휘어지고 베베 꼬이는 기괴한 춤. 속이 비어버린 껍질처럼 보이는 몸짓도, 어지럽게 뒤섞이는 움직임도, 결국 타인과의 접속을 향한 시도이며, 불완전한 혼합 안에서만 가능한 선명한 순간을 향한 몸의 의지다. 그의 작업은 그 기괴함이 곧 하나의 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윤대원, 〈for Daniel Linehan〉, 2023, 16/9(3840x2160), 00:06:30, 퍼포먼스, 2채널 비디오

윤대원, 〈빙글-뱅굴 시리즈〉, 2023, 9/16(1080x1920), 퍼포먼스,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윤대원, 〈빙글-뱅굴 시리즈〉, 2023, 9/16(1080x1920), 퍼포먼스,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